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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도시 위르귀프의 역사

동화도시 위르귀프의 역사

우주의 영혼이
계곡을 거니는 여행이야기......

역사가 고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위르귀프의 과거를 살펴보려면 카파도키아의
역사를 들여다봐야 합니다.
이 지역은 오늘날과 같이 고대에도 동서남북을 연결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동화도시 위르귀프의 역사 동화도시 위르귀프의 역사

동쪽으로 이동한 마케도니아인(알렉산더 대왕), 로마인, 파티흐와 야부즈, 그리고 그들의 후계자들 모두 이 지역을 거쳤으며 이곳에서 물자를 보충했습니다. 이 지역은 아시리아 시대에 ‘캇파투카’로 불렸고 고전 시대에는 ‘카파도키아’라고 불렸습니다. 위르귀프는 응회암으로 둘러싸여 땅이 매우 부드럽고 방어시설로도 유리하기 때문에 히타이트와 이집트인들은 이 지역을 두고 싸웠으며 이곳의 전략적 중요성으로 인해 전쟁이 빈번히 발발하였습니다. 전략적 가치와 자연이 부여한 여러가지 유리한 조건을 갖춘 위르귀프와 주변 지역은 과거에 풍부하고 다채로운 삶을 수용했다는 사실은 고고학적 증거, 역사 기록 및 살아 있는 사례에 의해 입증되었습니다. 히타이트학, 수메르학 및 고대언어 생리학과 같은 분야가 탄생할 때까지 이곳에 대한 지식은 그리스 역사학자들의 전설로 내려오는 이야기와 기원전 1세기까지의 지식에 불과했습니다. 19세기에 해당 분야들의 탄생으로 기원전 5000년~4000년 전의 주거.정착 흔적을 볼 수 있습니다. 문자는 기원전 2000년에 상업 식민지를 건설한 아시리아인에 의해 아나톨리아에 전파되었습니다. 기원전 1000년경 히타이트인이 이 지역을 통치하였으며 기원전 6세기에 리디아 왕국과 통합되어 위대한 문명의 발상지였던 카파도키아가 기원전 521년에 페르시아인의 지배하에 들어갔습니다.

이 지역은 기원전 334년경 알렉산더 대왕의 통치를 받았고, 알렉산더 대왕은 자신을 대신하여 이 지역을 관리할 사령관을 임명했습니다. 그가 위임한 아리아라테스 1세는 기원전 323년에 카파도키아 왕국을 건국하였고, 이로써 카파도키아 왕국이 역사의 한 페이지에 자리를 잡았으며 바로 그 지역에 위치한 위르귀프는 전성기를 누렸습니다. 카파도키아의 문명 도시로서 위르귀프, 케메르히사르 및 카이세리 등이 있었습니다. 그 시기에 위르귀프의 인구는 거의 3만 명이었습니다. 카파도키아 왕국은 기원전 27년 로마의 침략을 받아 로마제국의 속주가 되었습니다. 기독교가 이 지역에 정착되면서 서기 53년부터 교회와 예배당이 지어졌으며 예루살렘과 시리아에서 핍박받은 기독교인들의 피난처가 되었습니다.심지어 이교도 로마의 핍박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는 위르귀프 지역에서 전파될 수 있었고 히타이트인들이 파낸 굴, 그리고 오랜 화산활동과 침식작용으로 형성된 계곡은 박해에서 탈출한 기독교인들의 피난처가 된 것입니다. 서기 336년 기독교인들에게 종교의 자유가 주어진 후 기독교는 카파도키아를 중심으로 급속히 확산되어 기둥 꼭대기에서 은둔생활을 하던 사제들의 종교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현재 방문이 가능한 교회들 대다수는 5세기에 지어졌으며 842년 성상파괴령이 종식된 이후에 교회벽에 도상이 그려졌습니다.

395년 로마제국이 분열된 후 카파도키아는 동로마제국(비잔틴제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습니다. 초기에 카파도키아는 외국의 압력을 피해 평온한 삶을 살았습니다. 이곳은 유스티니아누스 시대 (526~565년)에 중앙 속주로 남아 있었습니다. 이 행복한 시기는 7세기 초에 사산 제국의 침략으로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남쪽에서 온 마쓸라마 지휘하에 아랍 습격에 직면하게 되었으며 아랍인과의 전쟁에서 비잔틴 제국의 전초 기지가 되었습니다. 아랍인의 습격 동안 카이세리는 647년 및 726년에 두 번, 앙카라는 838년에, 그리고 케메르히사르는 806년에 점령되었습니다. 비잔틴 제국이 9세기에 아랍인의 습격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약 250년 동안 지속된 이 중대한 시기가 암석 카파도키아가 중요해진 계기가 되었습니다. 특히 기독교인들은 적의 심한 간섭과 박해로부터 이곳으로 도망쳐와 암벽과 계곡, 지하에 파낸 동굴에 피신하여 살았습니다. 단, 피신의 유일한 원인이 사산 제국과 아랍의 습격이 아니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이곳으로 이주하게 된 또 다른 이유는 성상파괴주의의 탄압과 이에 대한 분노였습니다.

성상파괴주의와 도상의 사용 여부는 오랫동안 비잔틴 제국의 논쟁거리였습니다. 그리스의 신을 형상화하는 관념과 동양의 신에 대한 추상적 관념은 늘 상반되었습니다. 비록 비잔틴 제국이 추상적 신의 개념을 가지고 있었어도 사람들은 감각적인 것이 필요했습니다. 725년에 황제 레오 3세가 성화성 공경을 금하여 성상 파괴 운동을 실시하였는데, 842년에 테오도라 황후가 성상파괴령을 종식시켰습니다. 이 날은 정교회에서 축일로 기념됩니다. 10세기와 11세기 중반에 만연했던 평화롭고 안전한 분위기의 영향으로, 카파도키아의 가장 아름다운 작품들이 생산되기 시작되었습니다. 괴레메 야외 박물관의 교회는 역시 이 시기의 산물입니다.

카파도키아는 1071년 말라즈기르트 전투 이후 1080년에 건국된 아나톨리아 셀주크 제국이 몽골의 침략으로 멸망되어 그 결과로 생겨난 공국들 중 카라마노을루 공국과 합병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모스크, 캐러밴서라이 (큰 여관), 마드라사뿐만 아니라 교회와 수도원 등도 만들어졌습니다. 무슬림과 기독교인 사이에는 아무런 갈등이 없었습니다. 튀르크-이슬람 주권은 기독교 공동체의 종교 사상과 활동에 간섭하지 않았고 그들에게 관대했습니다. 이 시기에도 교회 건설이 계속되었습니다. 샤히네펜디 마을에 있는 "40인의 순교자 교회"는 카파도키아에 지어진 마지막 암석 교회 중 하나입니다. (1216~1217) 카파도키아가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되자 기독교인들은 그들의 활발한 생활을 그만두어 암석 교회와 수도원을 떠났습니다. 위르귀프 지역은 침식작용으로 신비로운 분위기를 띠는데, 이러한 신비로움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선호하는 장소가 되었으며, 특히 ‘내세’를 생각하며 사후세계 준비를 원하는 이들의 은둔처가 되었습니다.

위르귀프 명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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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2세기에 살았던 Haios 또는 Ayios이라는 성직자의 이름으로, 라틴어 발음은 ‘Prokopios’입니다. (Bekir Kutukoglu 교수 인용) 가령, 한국어에서 ‘왔다, 갔다’의 어말어미가 빠져 원형이 ‘오-, 가-’인 경우와 마찬가지로 라틴어도 ‘-ios, -im, -in’ 등의 접미사가 탈락하여 Prokop만 남게 되는 것인데, 이는 ‘Pirekup’로 발음되다가 Urgup으로 변천하게 된 것입니다. 셀주크 제국 시대에 Prokop을 Pirekup으로 발음했습니다.

오늘날 베오그라드 남부에 똑같은 이름에서 유래된 Urgup이라는 마을이 있기도 합니다. “Les Eglises Rupestres de Cappadoce”이라는 작품과 그것의 부록 2번 지도에서 위르귀프는 ‘Prokopios’으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Ismail Habib Sevuk의 한 작품에서도 위르귀프라는 이름의 기원은 다음과 같이 설명됩니다. “옛날 옛날에 어떤 위르귀프 사람이 무역을 위해 튀르키스탄에 갔다. 그는 고향이 어디냐는 질문에 ‘위르귀프’라고 대답하자 사람들이 ‘당신 고향에 석이 많겠다’고 했단다. 그 위르귀프 사람이 놀라고 ‘이렇게 멀리 사는데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았니’라고 묻자 그 사람들은 이름만 듣고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그 사람들이 ‘귀프’가 ‘많다’를 뜻하며 ‘위르’는 성이나 암석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다고 한다.”

비잔틴 제국에서 이 지역은 ‘Osiana’라고 불리기도 했으며 셀주크 제국에서는 ‘바쉬히사르’라고 명명되었고 오스만 제국에서는 ‘위르귀프’라고 불렸습니다. 카파도키아는 자연이 우리에게 선물해준 한 동화나 다름없습니다. 자연과 역사가 지구상에서 조화롭게 만나게 되는 장소가 바로 카파도키아입니다. 지리학적 현상으로 만들어진 버섯바위 (요정의 굴뚝)는 사람들이 굴을 파서 거주지를 만들고 교회를 만들어, 벽화로 장식화하여 수천 년의 문명의 흔적을 오늘날까지 이어왔습니다. 이 경이로운 문화재를 보존하기 위해 밀레투스의 탈레스는 리디아 왕이 페르시아 제국의 침략을 방지할 수 있도록 할뤼스 강(붉은 강)을 가르고 건넜으며 역사상 최초의 과학적 계산도 이곳에서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카파도키아의 명성이 높아져 국경을 넘으면서 위르귀프와 다른 마을들은 카파도키아에 뒤처져 이름이 잊혀지게 되었습니다.

우르귀프, 아바노스, 젤베, 괴레메의 아름다움과 문화적 풍요로움은 수세기 동안 역사학자들과 여행자들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카파도키아는 페르시아 시대에 "캇파투카"로 불리기 시작되었는데, 이는 좋은 말들이 자라는 지역이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만 그 단어의 어원이 하티어, 루비아어, 히타이트어 또는 아시리아어인지는 여전히 의제로 남아 있습니다. 이 지역의 말 사육과 관련된 자료가 연구되어 중요한 데이터가 얻어졌습니다. 히타이트 대제국 (기원전 1460~1190년) 시대에 히타이트인들은 말 사육을 중요하게 여겼으며 미탄니에서 말 사육 전문가를 데려와 그들의 지식과 충고를 기록하여 대대로 전하기도 했습니다. 사실 보아즈쾨이 기록 보관소에서 키쿨리라는 미탄니 출신의 젊은 말 사육사가 쓴 작품이 발견되었습니다. 크세노폰이 기원전 401년에, 아마시아의 스트라본이 서기 18세기에, 니사의 그레고아르는 서기 334~394년에, 다시 맥칸(괴레메)의 한 젊은 농민이 서기 495~515년에 이 지역의 역사에 대한 글을 남겼습니다.

프랑스 왕궁에서 지중해 국가로 여행하도록 임명받은 폴 루카스는 그의 여행기에서 이 흥미로운 지역을 근대 유럽에 처음으로 소개했습니다. 프랑스 국왕 루이 14세로부터 동부를 탐험하라는 명령을 받은 폴 루카스는 1705년 8월에 앙카라에서 카이세리로 가는 길에 아바노스와 위르귀프를 보고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동화 같은 이 지역의 지질 구조, 특히 바위집과 교회, 교회 내부의 다채로움이 그를 놀라게 했습니다. 고향으로 돌아간 루카스는 1712년 파리에서 두 권의 여행기를 출간하면서 카파도키아 지역에서 본 것을 다음과 같이 다소 과장되게 묘사했습니다. “붉은 강 건너 기슭에 있는 옛 건물의 폐허를 보았을 때 꽤나 놀랐다. 난생 처음 보는 수많은 피라미드가 늘어서 있었고, 다 멋진 문과 계단, 큰 창문이 있었다. 하나의 바위 덩어리에 여러 개의 굴이 파여 있었고, 이런 암벽이 몇 백 개가 아니라 몇 천 개였다. 그려진 모양들이 수도승 머리장식을 떠올리게 해서 처음엔 이 피라미드들이 옛날 수도승 거주지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1714년 이 지역을 두 번째로 지나갔을 때 그는 요정 굴뚝을 ‘파괴된 고대 도시의 묘지’라고 묘사했습니다. 하지만 루이 14세가 그를 믿지 않았고 폴 루카스가 공상허언증에 걸려 거짓말을 했다고 생각했으며 이스탄불에 있는 프랑스 대사 콤테 데사유에게 위르귀프를 가서 폴 루카스가 진실을 말하고 있는지 조사해보라고 지시를 내렸습니다. 데사유는 그 지역을 직접 가 수천 개의 피라미드 모양의 조각들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여 왕에게 알렸습니다. 그 여행기가 출판되었을 때 유럽 대중들에게 큰 논란을 일으켰습니다. 위르귀프와 그 주변 지역은 당시 유럽에서 머나 먼 땅으로 인식되었고 게다가 루카스가 전달한 정보는 카파도키아에 대한 고대 자료와 일치하지 않았습니다. 폴 루카스의 환상적인 묘사는 서양에서 관심을 끌었지만 일부 사람들에게는 믿음성이 없었으며 의심을 받았습니다. 독일 작가 C. M. Wieland (1733~1814)는 루카스를 다음과 같이 비판했습니다: “이런 지역은 고대문헌이나 여행기에서 한번도 언급되지 않았는데, 그렇게 많은 피라미드 집이 존재하다는 것을 믿는 것이 불가능해 보인다.”

루카스보다 약 130년 후에 이 지역에 온 프랑스 여행가 Charles Texier의 묘사가 현실에 더 가깝습니다. 아나톨리아에서 연구를 수행하도록 프랑스 정부의 지시를 받은 이 유명한 건축가는 1833~1837년 사이에 아나톨리아를 여행하면서 카파도키아 지역을 자세히 다루기도 했습니다. 그는 아나톨리아 여행을 마치고 그가 연구한 결과와 평가를 “Deion de I'Asie Mineure...”라는 6권의 작품으로 발표하여 이 지역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습니다. “자연이 자신의 모습을 이렇게 비범하게 드러낸 것을 처음 본다. 세상 어디에도 카파도키아보다 더 환상적인 자연현상을 듣도 보도 못했다.” 루카스 이후 19세기에 이 지역을 찾아온 여행가들 대부분이 과학적 연구를 위해 카파도키아를 방문했으며 그들은 독특한 지질 구조 앞에서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영국 여행가 W.F. Ainsworth는 화산계곡의 비현실적인 모습을 보고 “강을 따라 이어진 계곡을 지나자 여기를 끝없이 둘러싸고 있는 원뿔형, 주상형 바위들의 숲 속에 들어가 있었다. 마치 아주 오래된 큰 도시의 폐허를 방문하는 것 같았다. 어떤 원뿔형 굴뚝은 꼭대기에 크고 이상한 모양의 돌들이 있었다.”라고 그 광경을 묘사했습니다. 1837년 7월에 이 지역에 온 영국의 유명한 지질학자 W. J. Hamilton은 “그 지역의 비현실적인 모습을 말로 표현할 수 없다”고 말하며 Texier의 의견에 동의했습니다.

1838년 10월, 유명 프로이센 육군원수 Moltke가 카이세리에서 네브셰히르로 가는 길에 위르귀프에 들렀으며 그가 관찰한 풍경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가파르고 동굴로 묘하게 움푹 파인 절벽 위에 고대 성이 서서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위르귀프의 집들은 돌을 깎아 우아하게 만들어졌으며 위르귀프 뒤편 고원에 포도원이 펼쳐져 있고 깊은 계곡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그곳 비탈에는 오래된 벽지에서 본 그림처럼 신기하게 생긴 성들이 솟아 있었다.”

1862년에 출판된 Texier의 도서 ‘Asie Mineure’는 암석교회에 관한 자세한 소개를 담고 있습니다. Texier는 영국의 건축가 R.P. Pullan과 함께 1864년에 공동출판한 비잔틴 건축에 관한 작품에서 위르귀프와 그 주변의 암석 교회를 자세하게 다루었습니다. 영국인 W.J. Hamilton도 ‘그 지역의 비현실적인 모습을 말로 표현할 수 없다’며 감탄을 표한 바 있습니다.

이 지역에 대한 과학 연구와 작품 출판은 19세기 말에 시작되었는데, 카파도키아 지역의 물리적 구조에 대한 연구와 역사적 자료의 소개는 A.D. Mordtmann, W.M. Ramsey, J.R.S. Steret과 Texier 등의 과학자들에 의해 수행되었습니다. G. de Jerphanion은 1907~1912년에 ‘카파도키아 암석 교회’라는 작품을 출간하여 암석 교회, 수도원, 벽화를 미술사의 측면에서 체계적으로 다루는 최초의 주요 연구를 발표하였습니다. 1958년, 프랑스인 Nicole Thierry와 Catherine Jolivet는 Jerphanion 사제의 연구에서 언급되지 않은 교회들 또한 소개하여 카파도키아가 현재의 명성을 얻는 데 기여를 했습니다.

이 지역 최초의 인류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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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역에서 구석기 시대의 흔적이 발견되나 그 역사는 그리 오래가지 않으며 아마도 후기 구석기 시대로 거슬러 올라갈 것 같습니다. 이는 ‘뷔름’ 빙하가 아나톨리아 고원에 오랫동안 머물렀고 특히 화산 폭발로 인해 사람들이 정착할 수 없는 지역이었기 때문이라고 가정합니다. 자료가 부족하지만, 강둑과 담수 자원이 풍부한 카파도키아 지역의 계곡들이 최초의 인류 정착에 매우 적합한 환경을 제공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금속을 사용하지 않고도 (흑요석 같은 단단한 돌로) 쉽게 파낼 수 있는 음회암이 사람들에게 따뜻한 주거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계곡 양쪽에 높이 자리 잡은 암벽도 방어에 적합했습니다. 인간들은 수십만 년 동안 생계를 위해 과일을 채집하고 사냥하고 낚시를 하며 생존했는데, 특히 물에 의존하여 강둑에 정착했습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붉은 강은 정착하기에 아무 결핍이 없는 지역이었습니다. 그러나 카파도키아의 살아있는 자연과 시간이 흐르면서 이 지역으로 이주한 사람들에 의해 주거지가 확대되고 흔적들이 지워지고 사라지면서 최초 인류 정착을 입증할 증거들이 없어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러므로 카파도키아 암석 유적지의 연대를 정하는 것이 매우 어려우며, 심지어 불가능하기도 합니다.

히타이트 시대 정착지와 중요한 유물, 그리고 겔베리 지역 근처의 유럽 대륙 문화와 관련된 선사 시대 문화유물 외에도, 영국 고고학자들은 위르귀프에서 남동쪽으로 8km 떨어진 아블라 언덕에서 구석기 시대와 신석기 시대의 석기들 또한 발견했습니다. 마찬가지로, 1964~1966년 사이에 영국 고고학 연구소에 의해 앙카라에서 수행된 선사시대 연구 결과가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Ian Todd의 지시로 수행된 연구 결과, 니이데와 네브셰히르를 비롯한 지역에서 정착지 흔적들이 확인되었습니다. 일례로 네브셰히르 주에 위치한 이이델리 체슈메, 아즈괼, 타틀라린 마을에서 신석기 시대의 중대한 정착지 흔적이 발견되었습니다. 악사라이에서 북서쪽으로 18km 떨어진 투즈괼뤼(소금호수) 주변 예실로바 아젬회위크에서 진행된 발굴도 꽤 흥미로웠습니다. 여기서 발견된 유물들은 4세기 말 ~ 7세기 중엽에 해당하며 비잔틴 건축물 아래서 일직선으로 배열된 집들로 이루어진 정착지가 발견된 것입니다. 발견된 유물들은 이 지역이 무방비 상태의 농업지대였음을 보여줍니다. 비잔틴 제국의 정착지 (3층) 위의 층이 로마 시대여야 하지만, 여기서 기원전 1세기~기원후 1세기 사이에 속한 헬레니즘 시대의 특징을 지닌 석기 항아리가 발견되었습니다. 여기서 약 4m 밑에 있는 문명촌 역시 헬레니즘 시대와 관련이 있습니다. 4개의 층으로 구성된 이 정착촌 대부분은 화재와 지진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4층 정착촌은 심한 화재로 없어지고 5층에서 발견된 웅크린 채 몸을 감싸고 있는 두 노인의 시체가 끔찍한 지진이 났음을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화재로 소실된 7층에서도 웅크러 누운 청년 2명의 시신이 발견됐습니다. 8층 위에 메가론 건축형태로 세워진 집들이 발견되었습니다. 16층에서는 메워진 제방 위에 흙벽돌 성벽이 발굴되었습니다. 17층에는 기원전 600~500년 무렵에 속한 기하학적 무늬가 있으며 광택이 나는 붉은 도자기들이 발견되었습니다. 19층과 24층 사이에는 히타이트와 초기 청동기 시대의 문화유적이 있습니다. 19층, 20층, 22층에서는 간단한 기술로 만든 성벽과 히타이트 전통의 그릇들이 발견되었습니다. 이에 덧붙여 기원전 4000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칼콜리틱과 초기 청동기 시대의 유물이 발견되었습니다. 1968년에 하즈벡타쉬 언덕(술루자카라회위크)에서 고대 히타이트, 중세 히타이트, 프리기아, 로마, 후기 로마, 비잔틴의 유물들이 발굴되었으며 다시 1967년에 토파클르 회위크 발굴에서 초기 청동기 시대부터 비잔틴 시대까지의 24층이 발견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카파도키아 지역이 매우 오래된 거주지라는 것을 입증합니다.

정착생활로의 전환 후 정착촌 간에는 기본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무역과 같은 교류가 이루어졌으며 기초자재를 보유하고 생산하는 단체는 교류의 중심지가 되어왔습니다. 고대 청동기 시대 말기 (기원전 3200~1950년)에 아시리아 상인들은 붉은 강 주변을 ‘하티의 땅’이라고 불렀습니다. 북부 메소포타미아의 아시리아 상인들은 중앙 아나톨리아에서 광범위한 교역망을 구축했습니다. (기원전 1950~1750) 이 교역망의 중심지는 카이세리 근처에 위치한 퀼테페-카네쉬입니다. 그 상인들이 남긴 수만 개의 테라코타 무역서신에 9개의 큰 무역중심지와 수백 개의 작은 도시 이름이 언급되어 있고, 네네사도 이들 중 하나입니다. 게다가 악사리에서 카이세리로 가는 자연 도로 중 하나는 붉은 강 가장자리입니다. 그 지역이 히타이트 시대에 거주지였다는 정보도 확인됩니다. J.C. Gardin과 P. Garelli는 19세기 초 아시리아인들의 교역로를 조사하던 중 상업적인 국경선이 인제수, 악사라이, 콘야, 보르, 니이데, 에렐리 지방까지 이어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네네사와 와샤니아가 이 지역의 경계 안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또한 점토판에는 아시리아 상인 두 명이 카네시 (카이세리-퀼테페)에서 부루샤툼(아젬회위크)으로 나흘 만에 가기 위해 쉬지 않고 와샤니아, 네네사 및 울라마 지역을 지났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1926년 언어학자 Emile Forrer는 보아즈쾨이 히타이트 왕실 기록보관소에서 조사를 하던 중 한 점토판에서 Zu-Winassa 도시의 이름을 보고 이것이 아시리아어로 히타이트 네네사를 가리킨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네네사 (또는 니사의 그레고리우스가 말한 St. Vanot)는 N. Therry의 연구에 따르면 Venessa에서 유래되어 Avanos으로 변화했습니다. 오스만 제국 공문서에는 Avanos가 ‘Enes, Uvenez, Evenez’ 등으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기원전 2000년경에 중앙 아나톨리아에서 도시국가들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시기에 히타이트 족은 중앙 아나톨리아, 즉 하티(Hatti)로 건너가 기원전 1750년에 지배권을 확립했습니다. 기원전 1200년 트라키아와 지중해-에게해 부족들은 호메로스의 서사시에서 거론된 트로이아를 엉망으로 만들고 히타이트 제국을 멸망시켰습니다. 이러한 침략의 결과로 아나톨리아는 400년의 암흑기에 묻혔고 프리기아인들의 지배를 받게 되었습니다. 기원전 800년경에 히타이 타발 왕국이 이 지역에 다시 나타났습니다. 타발 왕국은 말 사육으로 명성을 얻었는데 기원전 700년경에 파괴되었습니다. 이 왕국의 중심지는 보르 주변의 투반나 (타나-케메르히사르)입니다. 카파도키아 지역의 최초의 민족은 하티, 루위, 히타이트인이었습니다. 이 지역에서 아시리아인들은 기원전 3000년 말에서 기원전 2000년 초에 무역 식민지를 세웠습니다 (아시리아 무역 식민지 시대). 퀼테페(Kanesh)에서 발견되어 ‘카파도키아판’이라고도 불리는 아시리아 쐐기문자판(기원전 2000년 초기)은 아나톨리아의 첫 문서 기록입니다. 비문을 연구하여 읽음으로써 아시리아 상인들의 문자판이었던 것이 밝혀졌습니다. 그 시대의 사회적 및 정치적 배경을 알려준 이 쐐기문자판은 사실 상업적이고 경제적인 계약이었습니다. 이 문서에 따르면 중앙 아나톨리아는 중심권위에 속하지 않고 작은 왕국과 공국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이 지역 사람들은 작은 영토에서 평화롭게 살았다고 합니다.

당시 가장 중요한 도시였던 카네쉬(퀼테페)는 아나톨리아에서 무역 활동의 중심지였습니다. 기원전 9세기 후반에는 타발 왕국이 이 지역을 완전히 점령했습니다. 하즈벡타쉬-카라부르나, 토파다(아즈괼), 귈셰히르-스와사(괵체토프락)에서 발견된 상형문자 암각은 이를 증명합니다. 히타이트 제국의 중심이 된 지역이 나중에 프리기아와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그 후 킴메르와 스키타이족에 의해 점령되었고 기원전 700년 후에 리디아, 메드와 페르시아 제국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네브셰히르와 주변 지역은 6세기부터 리디아인의 통치하에 있었는데, 6세기 중엽에 리디아 왕 Cresus은 페르시아 습격을 방지하기 위해 붉은 강을 건넜습니다 (기원전 575-546년) . 밀레투스의 탈레스는 Cresus에게 강을 건너는 길을 알려주었습니다. 역사학자 헤레도토스는 “그때 저택에 있던 탈레스는 저택의 위쪽을 향해 반달 모양으로 깊은 도랑을 팠다. 옛 강바닥에서 벗어난 강이 저택의 반대 방향에서 들어와 빙빙 돌다가 다시 옛 강바닥으로 돌아왔다. 이로써 둘로 갈라진 강을 건너는 것이 훨씬 수월해졌다.” 며 그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이 전쟁에서 Cresus가 패배하면서 이 지역은 페르시아의 지배하에 들어갔습니다. 페르시아인들은 이 지역 주민들에게 이주를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대지의 관리를 페르시아 출신의 군사 귀족들, 즉 민중의 종교 지도자들에게 맡겼습니다. 현지 문화가 페르시아 문화와 융합되었으며 헤로도토스는 페르시아인들의 문화 특징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습니다. “그들은 신상과 신전, 제단을 만들 줄 모른다. 그들은 산꼭대기에서 희생자를 바치며 제우스라고 부르는 것이 신성한 하늘을 말한다. 또한 태양과 달, 땅, 불, 물, 그리고 바람에게 제물을 바친다.”

페르시아인들의 불 숭배는 카파도키아 지역에서 더욱 중요해졌고 화산 에르지예스 산이 불을 숭배하는 의식에 매우 적합했습니다. 페르시아 신들은 다른 종교와 다르게 진정한 의미의 신전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대신 성지가 있었습니다. 카파도키아 지역에 흩어져 있던 성지에 수많은 배화신전이 있었습니다. 그리스 작가들은 이 신성한 지역을 Pirhethee라고 칭했으며 사제들을 Piree, 즉 불을 피우는 사람이라고 지칭하였습니다. 젠드어로는 이 사제들을 Atharvan이라 불렀는데, 이는 불의 사제라는 뜻입니다. 배화신전은 성지 안에서 높은 곳에 자리잡아 꺼지지 않은 불과 재로 덮인 석굴이었습니다. 긴 흰 예복을 입고 머리위에서 입술까지 덮은 모직 모자를 쓴 Atharvan (사제)들은 매일 덤불 보따리를 들고 성지에 들어가 배화신전에서 한 시간 동안 찬송가를 부르곤 했습니다. 때로는 제물로 음료수나 동물을 바치기도 했습니다. 제물을 바칠 때 철의 사용이 난폭하게 인식되어 나무 망치를 사용했습니다. 카파도키아에서 이들의 가장 중요한 성지는 페르시아어로 Zela (또는 Zile)라고 불렸습니다. Gunaltay 교수는 특히 스타본 젤라 성소가 아나티스, 오마노스, 아나다테스로 기록된 세 신에게 바쳐졌다고 거론하였습니다. 페르시아인이 불을 숭배하는 신앙이 카파도키아에서 쉽게 받아들여져 페르시아인은 그들의 신앙을 인정하고 뒷받침하는 완벽한 환경을 접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불과 화산으로 뒤덮인 이 지역은 그들에게 이상적인 환경이었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역사학자들은 서기 4세기까지 수세기 동안 불의 신에게 바친 사원의 존재를 밝혔습니다.

페르시아 시대에 이 지역은 "카파도키아"라고 불렸으며 카파도키아 사트라피 (국가)가 이곳에 설립되었습니다. 페르시아 시대에 카파도키아에서 가축 사육이 매우 발달했고 페르시아인들은 매년 360달란트의 세금으로 1500 마리의 말, 2000 마리의 노새, 5만 마리의 양을 사서 길렀습니다. 해안에서 무역이 발달한 반면 내륙에서는 폐쇄적인 무역 정책이 있었습니다. 재정 시설이 한정된 페르시아 제국은 점차 힘이 약해지고 말았습니다. Gunaltay 교수는 “페르시아의 정복으로 비옥한 땅이 높은 지위의 군인들에게 주어져 소작농들이 노예로 전락했다. 페르시아의 귀족들은 화려하고 호화로운 생활 방식 때문에 부를 잃게 되었을 때 그리스나 로마의 노예상들에게 소작농을 팔곤 했다. 오직 신전의 노예들만 사고 팔 수 없었다. 이러한 사건들이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 온 문명, 즉 퀼테페 점토판 시대에서 온 문명이 완전히 파괴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런 사회적 재난 때문에 카파도키아인들은 자신의 민족 전통을 잊어버리고 이오니아 문명도 보호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기원전 334년~331년, 마케도니아의 젊은 왕 알렉산드로스가 페르시아 군대를 물리치고 대제국을 무너뜨린 뒤에 평화로운 분위기가 형성되었으나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 원정이 끝나자 (기원전 333~323년) 그 평화로움도 끝이 났습니다. 불안 속의 삶은 알렉산드로스의 장군과 그들의 후계자들의 끊임없는 전쟁으로 계속되었습니다. 서기 17년 카파도키아는 로마의 속주가 된 후 지속된 전쟁으로 가난해졌고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는 카파도키아가 처한 빈곤을 보고 세금을 경감하기로 하였습니다. 그 다음 해에도 카파도키아에 로마인 총독이 임명되었습니다.

로마인도 비잔틴도 이 지역을 자신들의 문화에 동화시키고 무역로를 통제함으로써 넓은 카파도키아 지역의 잠재력을 이용하려고 했습니다. 위르귀프는 이 시기에도 중요한 종교 중심지였는데 마을, 읍과 계곡의 암석 교회와 수도원이 주교회의 중심지였다는 사실은 이를 증명합니다. 담사(Damsa) 개울의 동쪽에 있는 아블라(Avla) 산의 기슭에 있는 로마 시대 암석 묘지도 위르귀프가 종교 중심지였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종래 다양한 이름을 가진 위르귀프는 비잔틴 제국 시대에서 오시아나 (Assiana), 하기오스 및 프로코피오스, 셀주크 시대에는 바쉬히사르, 오스만 제국 시대에는 부르구트 성이라고 불렸으며 튀르키예 공화국 초기에는 위르귀프로 불리기 시작되었습니다.

11세기 셀주크 왕조의 중요한 도시인 콘야와 니이데로 이어지는 도로의 요새였던 위르귀프 도심부에 있는 Altikapili 무덤과 Temenni 언덕 무덤이 셀주크 시대에 속하며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끕니다. 한 엄마와 두 딸의 무덤인 ‘Altikapili 무덤’은 13세기에 지어졌으며 육각형에다가 양쪽에 아치형 창문이 있고 지붕이 없습니다. 위르귀프의 Temenni 언덕에 2개의 무덤이 있는데 이들 중 하나는 1268년에 Vecihi 파샤에 의해 건설되어 민간인 사이에 흔히 ‘Kilicarslan 무덤’이라고 불린 셀주크 술탄 Ruknettin Kilicarslan 4세의 무덤이며 또 하나는 Alaaddin Keykubat 3세의 무덤인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러나 연구에 따르면 그 가능성이 다소 희박합니다. 1515년 오스만 제국이 위르귀프를 장악하고 18세기 오스만 제국의 대재상인 Ibrahim 파샤가 카디 집무실을 그의 출생지인 네브셰히르 (무슈카라)로 이전하면서 위르귀프는 처음으로 전면에 나서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위르귀프의 또 다른 중요한 유적지는 그리스식 목욕탕입니다. 그리스 비문에 따르면 목욕탕의 토대가 1900년에 만들어졌고 1909년에 민간인의 도움으로 건설이 완성되었습니다. Semsettin Sami는 1888~1900년에 쓴 Kamus-ul Alam이라는 역사 및 지리학에 대한 그의 작품에서 위르귀프에 70개의 모스크, 5개의 교회, 11개의 도서관이 있다고 전했습니다. 위르귀프 주변에 있는 판자를륵 계곡, 위젠기 계곡, 케쉴릭 계곡은 높은 역사적 가치와 자연적 가치를 지닌 계곡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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